[이강재의 8체질] 7 September, 1962
상태바
[이강재의 8체질] 7 September, 1962
  • 승인 2019.07.20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권도원 선생의 첫 체질침(體質鍼) 논문인 「The Constitutional Acupuncture」의 서론(Preface)에는 ‘7 September, 1962’라고 적혀 있다. 이 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1] 청년 권도원

청년 권도원은 해방 전까지 백두산(白頭山) 아래 간도(間道) 지역에서 아동개척단의 인솔자로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 있다가 가족을 이끌고 전라북도 옥구(沃溝)로 내려간다. 일본인들이 건설했던 불이농촌(不二農村)1)을 불하해준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활동에 참여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2) 옥구군 위원장이 된다. 제헌의원 선거에 옥구군에서 출마한 이요한(李要漢) 후보의 당선에 기여하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전북도당 위원장인 이요한을 전북 도지사에 임명하자 권도원은 그의 비서실장이 된다. 이렇게 청년 권도원은 정치 지향이었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서른네 살이었던 1954년에 권도원은 돌연히 상경한다. 그런 후에 그는 40대가 시작될 때까지 한동안 자신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내걸지 못했다. 그는 사상의약보급회(四象醫藥普及會)와 사상의학회(四象醫學會)3)란 우산 아래에서 권일봉(權一峰)과 권항전으로 존재했다. 상경 후에 그는 사상의약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된 행위를 통해서 경제를 해결하고 있었지만 그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그것은 법과 제도가 인정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서 목회자가 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국학대학(國學大學) 국문과 졸업장을 통해서 한국신학대학 신과(神科)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신과를 졸업하는 1958년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목회자가 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그는 다른 목표를 세워야만 했다. 그래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에 개설된 ELI에 등록한다. 영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심리상담가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눈병이 났고, 이노우에(井上惠理)의 취혈표에서 여구(蠡溝)혈이 들어있던 치료처방을 발견하였고, 얼마 후에는 체질침을 창안하게 된다.

1958년까지 동무 이제마의 탄일(誕日)과 관련한 신문 기고는 사상의학회 회장이던 이현재(李賢在)의 몫이었다.4) 그런데 1959년에는 이례적으로 부회장인 권항전(權巷全)이 글을 실었다.5) 4월 26일, 동아일보에 권항전이 ‘사상의학의 창시자’란 제목으로 쓴 글은, 권도원의 이삼십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이제마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지만, 그의 내부에는 획기적인 ‘체질침의 창안’이라는 특별한 자부심이 충만해 있었다고 생각한다.

 

[2] 權巷全

권도원 선생이 체질침을 창안(創案)한 시기는, 1958년에 한국신학대학 신과를 마친 후부터 동아일보에 ‘사상의학의 창시자’를 기고한 1959년 4월 사이일 것이다. 체질침으로 이현재 선생의 비서를 처음 고쳤고, 비서의 지인이 오래도록 앓던 불면증도 고쳤다. 그 지인은 체질침의 놀라운 효력에 반해서, 자신이 소유한 명동 국제빌딩에 있는 사무실 하나를 치료소로 쓰라고 빌려준다. 2층에 도심다방이 있던 국제빌딩 앞은 전국에서 모여든 병자들로 장사진을 이루게 된다.

권항전은 기고에서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자신만의 언어로 해설한다.

“사상의학을 고찰하여 본다고 하면 먼저 이 의학은「체질의학」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말할 때 가장 간명한 설명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아마도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체질의학(體質醫學)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최초의 인사(人士)일 것이다.

사상의학이란 사형태적(四形態的) 체질의학으로, 불균형(不均衡)한 내장조직(內臟組織)의 경향성6)으로 인한 불균형이 심화된 것이 백병의 근원이라고 하였고, 동무 공의 『壽世保元』은 새 인간학이요, 새 철학이라고 평가하였다.

권항전은 사상의학의 혜택이 “널리 세계에 미치도록 선양(宣揚)해야 할 것이다”로 글을 맺었다. 이 말은 널리 세계에 선양해야 할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다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는 사상의학이 있고, 또 동무 공은 갖지 못했던 체질침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권항전이 사상의학을 체질의학이라고 천명한 숨은 뜻이다.

 

[3] 한의사의 길

1960년대 초는 우리 사회의 격변기였다. 1960년의 3.15부정선거를 통해서 4.19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붕괴했다. 1961년 5.16 쿠테타는 기나긴 군사독재의 서막이었다. 권도원 선생이 롤모델로 삼았던 이승만은 몰락했고, 이승만처럼 미국에 가서 박사가 되고 또 국제적인 인물이 되고 싶었던 권도원 선생의 꿈도 눈병 사건을 통해서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좌절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는 체질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1960년에 그의 삶의 키(舵)를 쥔 인물인, 동양의대에 출강하던 노정우가 있었다. 권도원 선생은 1960년과 1961년에 있었던 두 번7)의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을 거쳐서, 1962년 3월 21일에 치러진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1962년 3월 26일에 한의사가 되었다. 한의사 면허번호는 1295이다.

한의사가 된 권도원 선생은 마흔두 살이다. 중학교 진학도 어려웠던 궁핍했던 어린 시절,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갈 수 있었던 기회의 박탈, 일본 경찰의 감시를 견디지 못해 떠났던 간도에서의 생활, 20대 후반기를 사로잡았던 정치활동,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지탱해주던 기독교적 신앙에 따른 목회자의 삶이 좌절되는 등 굴곡을 겪었는데, 지난날을 돌아보면 한의사란 직업은 참 뜻밖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경제적으로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와 정규적인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학력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로 인해 한의사로서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독창적인 업적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 되고픈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중화민국 타이페이에서 국제학술대회8)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4] 旅券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최 측에 참가신청서와 논문의 개요나 초록을 보내서 참가 승인을 얻고, 초청장을 받으면 논문 초고를 작성하고, 그런 후에 번역을 하여 발표논문을 완성하는 순서를 거치게 될 것이다.

1962년 9월 7일은 체질침 논문의 영문 번역본이 완성된 날짜일 것이다. 학술대회 개최 공고를 본 것, 참가신청과 승인, 초청장 접수, 논문 초고 작성, 영문번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권도원 선생이 한의사 생활을 시작한 1962년 4월 이후로 9월 7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타이페이에 가려면 중요한 절차가 남았다. 여권(旅券) 수속이다.9)

의림사(醫林社) 사장이던 배원식 선생은 1961년에 일본 동양의학회의 초청으로 도일하였는데, 1961년 2월 10일에 초청장을 받고, 여권 수속을 시작하여 4월 10일에 여권이 나왔다. 그런 후에 4월 26일에 입국허가를 받아 4월 27일에 출국하였다. 배원식 선생의 예로 보면 여권 수속에만 2개월이 소요되었고, 초청장을 받고 출국하기까지는 2개월 반 정도가 걸렸다.

결과적으로 권도원 선생은 학술대회에 가지 못했다. 중화(中和)한의원의 우인평 원장이 학회에 다녀온 후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여권 수속 등 사정에 의하여 필자만이 단독으로 참가하게 되었음은 매우 유감된 일이었다”고 하였다.

1962년 9월 28일 오후 6시부터 서울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서울특별시한의사회가 주최한 제1회 한의학연구발표회가 열렸다. 이종해(李鐘海) 회장은 개막사를 했다.

“그리고 鍼灸學에 대해 발표하는 선생 가운데 今般 중국 臺灣에서 열리는 東南亞鍼灸學會(대회일자 10월 6일~8일)에 초청받은 분이 있어 그 학회에 가서 발표할 演題를 떠나기 전에 국내 여러 선생들 앞에 한번 발표하는 것도 큰 意義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연사는 여섯 명이었다. 권도원 선생은 연제는 ‘체질침구학에 대하여’이다. ‘체질침 첫 논문’의 일부는 이 자리에서 발표되었다. 그리고 논문은 오래도록 감춰져 있었다.

 

※ 참고 문헌

1) 의성 이제마 선생의 120회 탄일을 맞아『동아일보』1956. 4. 13.

2) 사상의학회 발족『동아일보』1957. 4. 28.

3) 부서 임원 등 선정『동아일보』1957. 5. 3.

4) 인간과 사상『동아일보』1958. 5. 7.

5) 사상의학의 창시자『동아일보』1959. 4. 26.

6) 『醫林』26호, 1961. / 30호 1962.

7) 于仁平, 國際鍼灸學會大會를 보고『동아일보』1962. 11. 22.

8) 자유화 25년, 해외여행 어제와 오늘『중앙일보』2014. 1. 3.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1920년에 전북 군산과 옥구 지역의 호남평야에 320가구의 일본 농민들을 이주시켜서 건설했다.
2)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에 결성된 우익 계열의 범정당 정치단체이다.
3) 사상의학회 발족『동아일보』1957. 4. 28.
   사상의약보급회에서는 지난 4월 18일 사상의약의 개조 의성 이제마씨 제121회 탄일 기념좌담회에서 유기체 창립에 관하여 협의한 결과 오는 4월 30일 하오 2시부터 시내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 사상의학회(가칭) 발기대회를 개최한다는 바 동지들의 다수 참회를 바란다고 한다.
   부서 임원 등 선정『동아일보』1957. 5. 3.
   지난 4월 30일 시내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사상의학회 창립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서와 임원을 선정하고 다수 입회를 희망한다는데 동회 사무처는 서울 다동 85번지에 두었다고 한다.
   ▶회장 李賢在 ▶부회장 權一峰 ▶조직부장 김희중 ▶재무부장 이배진 ▶연구부장 김광수 ▶계몽부장 김경렬 ▶감찰부장 성낙소
4) 의성 이제마 선생의 120회 탄일을 맞아『동아일보』1956. 4. 13.
   인간과 사상『동아일보』1958. 5. 7.
5) 사상의학의 창시자『동아일보』1959. 4. 26.
6) “大實한 臟器는 더욱 힘이 증가되어 지나치게 盛하고 小弱한 臟器는 더욱 힘이 減退되어 지나치게 衰하게 되기 쉬운”
7) 제10회, 제11회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
8) 1961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독일 뮌헨에서 제11차 국제침술학회(International Acupuncture Conference)가 열렸다. 중화민국침구학회의 회장인 오혜평(吳惠平) 박사가 11차 학회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 중화민국침구학회가 개최한 학술대회는 이 전통을 이어서 제12차 國際鍼灸學會 亞洲地區大會라고 칭하였다. 1962년 10월 6일부터 8일까지 중화민국 국회의사당인 中山堂에서 개막하였으며, 30개국에서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학술대회의 주의제는 ‘침구의학의 과학적 연구 발전’이었다. 
9) 여권을 발급 받았다는 거 자체가 일종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