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8체질] 權度源 한의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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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8체질] 權度源 한의사가 되다
  • 승인 2019.03.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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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1] 검정시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양한 조건을 지닌 의료(醫療) 자원(資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월남(越南)한 북한 출신 의료인이나, 진료현장에서의 경험은 있으나 의료 관련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경우 등이다. 이들 중에서 일정한 자격을 구비한 경우에 의료 관련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검정시험’ 1)이 1952년부터 있었다.

  보건사회부령으로 1958년 6월 26일부터 (일부 개정되어) 시행된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규정에서 이 검정시험은 매년 1회 이상 시행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제5조에 응시자격이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이와 동등한 학력) 2)이 있고 보건사회부장관이 지정한 의료기관에서 진료에 관하여 4년 이상 실지수련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도원 선생이 중고교와 대학을 어떻게 마쳤는지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한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는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을 통과한 후, 한의과대학 졸업생들과 함께 한의사국가시험에 응시하여 한의사면허를 취득했을 것이다.

 

[2] 노정우
  노정우(盧正祐) 선생3)은 1950년대 중후반에 동양의대(東洋醫大)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시 혜화동에 성화당(聖和堂)한의원을 열고 있었다. 이현재 선생이 이끌던 사상의약보급회(四象醫藥普及會)에서 권도원 선생은 동갑내기인 배은성(裵恩成)4) 선생을 만났다. 배은성 선생은 늦게 동양의대에 들어가서 한의학을 공부했다. 5)

  배은성 선생은 동양의대를 다닐 때 노정우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에게도 소개를 시켜 주었다. 배은성 선생이 전하기를, ‘권도원 선생은 노정우 선생의 성화당한의원과 홍순용 선생의 덕일한의원을 찾아다니면서 진료하는 장면을 관찰하기도 했다. 노정우 선생이 권도원 선생의 재주를 아꼈다. 한의계로 들어오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했다’고 한다. 6)

  노정우 선생은 당시에 각종 한의약 관련 국가시험의 출제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시험 일정과 내용에 관한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1960년 6월 1일에 제10회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의 공고가 났고, 어느날 노정우 선생이 위생학(衛生學) 책 한 권을 들고 권도원 선생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검정시험에 응시하라고 권고한다.

 

[3] 검정시험 응시자격
  한의사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은 제1부 시험 및 제2부 시험과 실지시험으로 구분한다. 제1부 시험과목은 생리학, 약물학(한약에 한함), 병리학, 해부학, 위생학으로 다섯 과목이다. 제2부 시험과목은 진단학, 내과학, 소아과학으로 세 과목이다. 실지시험은 진단학과 내과학이다. 제1부와 제2부, 실지시험의 시험일은 각각 다르고, 제1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제2부 시험을 볼 수가 없다.  

  제10회 검정시험의 응시자격은, 문교부장관이 인가한 자연과학계(自然科學系) 대학 2년 수료자(동등 학력 인정자)로서 보건사회부장관이 인정한 한의원에서 진료에 관하여 만 4년 이상 실지수련을 한 자이다. 검정시험 응시자에게 한의료실지수련증명서를 발급해 줄 한방의료기관도 최소한 4년 이상의 개설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권도원 선생은 1956년부터 1958년 2월까지 한국신학대학 신과(神科)에서 석사(碩士)과정을 밟았다. 석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국학대학(國學大學) 국문과(國文科) 졸업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권도원 선생과 절친했던 홍순용 선생의 덕일(德一)한의원은 1959년 초에 개원했으므로 실지수련증명서를 발급할 요건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증명서 발행기관은 노정우 선생의 성화당한의원일 거라고 짐작한다.

  권도원 선생이 어떤 자연과학계 관련 교육과정을 이수했는지, 언제부터 4년 이상 성화당한의원에서 한의료실지수련을 받았는지 나는 관련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는 여러 모로 ‘혼란스러운 시대’ 7)였다고 생각한다면 편하기는 하다. 

 

 [4] 검정시험의 절차
  제10회 검정시험의 제1부 시험은 8월 17일에 생리학, 약물학, 병리학 시험을 치르고, 다음날인 18일에 해부학과 위생학 시험을 시행했다. 그리고 제1부 시험 합격자 발표를 8월 25일에 했다. 권도원 선생은 제1부 과목을 모두 통과했다.

 

제2부 시험은 8월 27일에 있었고 9월 3일에 발표를 했는데, 권도원 선생은 내과학에서만 합격을 했다. 진단학과 소아과학은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노정우 선생이 검정시험을 권고하면서 건넨 수험 자료는 위생학 책 달랑 한 권이었다고 한다. 6월부터 두 달간 과연 권도원 선생의 두뇌는 어떤 방식으로 위와 같은 의학 관련 시험 내용을 학습했던 것일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8)

 

검정시험에서 한 과목이라도 합격을 하면 다음 번 시험에 다시 응시할 수 있었다. 제11회 검정시험은 1961년 10월 16일에 공고가 나왔고, 권도원 선생은 제2부 나머지 과목과 실지시험에서 모두 합격했다.
            

[5] 마지막 기회
  드디어 한의사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권도원 선생이 두 번째로 치른 제11회 검정시험이, 결과적으로 권도원 선생에게는 한의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한의사 검정시험은 이후에도 제14회까지 치러졌지만, 12회 이후의 검정시험은 북한에서 내려온 한의사만을 위한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제13회 한의사국가시험은 1962년 3월 21일에 있었고, 권도원 선생은 합격했다. 당시에 한의사국가시험 시험과목은 진단학, 내과학, 소아과학, 부인과학, 침구학, 의사법규였다. 합격자발표일은 1962년 3월 26일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권도원 선생이 한의사가 된 상황을 살펴보면 1959년 4월 26일, 동무공(東武公) 탄신일을 기념하여 동아일보에 기고한 권항전(權巷全)의 글이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그 글은 세상을 향한 권도원 선생의 선언(宣言)과도 같았던 것이다. 

  1962년 3월 30일자 관보에 제13회 한의사국가시험 합격자명부가 있다. 이 명부를 보다가 낯익은 두 사람의 성함을 발견했다. 바로 김 주(金洲)와 허 연(許燕)이다. 김 주 선생은 동양의대 졸업생이었고, 허 연 선생은 권도원 선생처럼 검정시험을 통과했다.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각주
1)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시험응시자격검정시험
2) 이후에 매 시험마다 학력 규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3) (1918~2008) 노동휘(盧東輝), 노중휘(盧重輝) 이런 이름을 쓰기도 했다.
4) 1922.1.22.~2013.8.31.
5) (1956~1960.2.) 동양의대 9회 졸업이다.
6) 배은성 선생과 2010년 2월 21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면담하였다. 
7) 1960년 6월 1일에 앞서 4.19가 있었다.
8) 제2부 시험을 앞두고 『방약합편(方藥合編)』을 사서 외웠다고 하는데 이 또한 놀라운 집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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