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필건 회장 추모]누구보다 한의사를 사랑한 김필건 회장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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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필건 회장 추모]누구보다 한의사를 사랑한 김필건 회장님을 추모하며
  • 승인 2019.03.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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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호

김지호

mjmedi@mjmedi.com


본지는 홀로 많은 것을 떠안고서 가슴 아프게 떠나간 고 김필건 회장의 영면을 바라면서,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각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고 김필건 회장의 활동을 되돌아 봅니다.

-편집자 주

 

우리는 모두 그의 시작을 알고 있습니다.

강원도하고도 정선. 그 시골마을의 촌부이자 온 동네 주치의였던 그가 한약을 뺏길 수 없다며 한의원을 폐업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웃으며 반겨주실 것 같은 한의사협회 1층 가장 구석진 곳에 차려진 비대위 사무실. 아직 책상도 들어오기 전 가장 먼저 그 사무실에 차려진 것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간이침대였습니다.

그 간이침대에서 비대위 임기였던 6개월을 보냈습니다. 주말이든, 공휴일이든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6개월 동안 그가 간이침대를 벗어나 자리를 비운 것은 단 세 차례뿐이었습니다. 어머님의 기일, 친한 지인의 상.

많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숙소를 구하지 않고 차디찬 협회 사무실 간이침대에 몸을 누이느냐고.

“후배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동안 이렇게까지 한의사를 둘러싼 제도들이 엉망인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 선배들 잘못이다. 선배들 잘못으로 후배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편하게 잠자리를 청하겠나. 여기서 일하다가 자고 자다가 일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 그리고 비대위 임기 마치면 정선으로 돌아갈건데 숙소 필요없다. 이렇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뒤 정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한의계 역사상 내부적으로 가장 시끄러웠을 2012년과 2013년. 우리는 그가 필요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 설령 그는 몰라도 작금의 한의계에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모든 한의사들이 그에게 협회장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고 애원하고 부탁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그가 간이침대를 비웠습니다. 며칠 생각을 정리한 그는 결심했고 사상 최초의 직선제 한의사협회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협회장이 되어서도 간이침대는 여전히 같은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나중에 숙소를 구하긴 했지만 그는 협회장 당선 이후에도 여전히 협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한의사를 위한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한의사의 미래는 명확했습니다.

이 좋은 한의학을 국민들에게 바로 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의사가 바로 서야 한다. 더 이상 우리 후배한의사들이 제대로 진단도 못하고 치료기술도 빼앗기며 살 수는 없다.

그것을 위해 은유적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 그의 모든 것을 내던졌습니다.

그렇게 간이침대에 이은 또 하나의 물건이 생겨났습니다.

단식투쟁을 위한 텐트. 간이침대마저 버리고 그냥 서있기만 해도 한기가 올라오는 협회 회관 1층 로비 차디 찬 스티로폼 위 텐트에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한의사 의료기기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 올리고 지지부진한 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고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양방 의료계만을 대상으로 진행된 정부의 노인정액제 제도 개편의 부조리함을 알리기 위해 지난 단식 투쟁으로 나빠진 몸을 부여잡고 한 번도 하기 힘든 단식투쟁을 또 한 번 치르고 끝내 노인 정액제 문제를 해결해냈습니다.

그는 그 간이침대가 놓여져 있던 사무실과 협회 회관 로비 스티로폼 위에서 회원들을 만나는 것을 즐겼습니다.

서로 본적도 없지만, 한의사를 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놓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한의사들은 항상 서로 정다웠습니다. 그는 참 무던히도 한의사들, 특히 후배한의사들을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협회장실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2012년 10월 28일. 수천명의 한의사가 한의사협회 회관에 모인 그 날. 누군가 그날 모인 한의사들의 위대한 모습을 옆 허준 박물관 옥상에서 담아냈습니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그날 모인 한의사들은 아크릴판에 저마다의 마음을 적어 모았습니다.

그날의 그 사진과 그 마음이 담긴 아크릴판은 그가 협회장실을 사용하던 내내 협회장실의 한 편에서 우리를 지켜보았습니다.

사상 최초로 협회를 방문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도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진과 아크릴 판을 설명하며 한의사들의 뜻을 보이며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 마음을 모두 이어받은 그는 매일 그 사진과 아크릴판을 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한의사들이 그를 비난하고 버렸을 때에도 그는 한의사들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탄핵 이후 그가 추진했던 중요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중에도 그는 더 이상 한의사협회장 직을 수행할 수 없음에도 한의사들의 꿈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방팔방 쫓아다녔습니다.

사실 그는 한의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협회장이 되고 처음 한 일은 직원 휴게실의 돌아가지 않던 전자레인지를 바꾼 일이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한 일은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습하고 추운 지하 주차장 언저리에서 겨우 몸을 녹이는 협회 청소 관리 미화원분들의 휴게실을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자 협회가 직접 운영하는 진료실을 차리고 수개월을 운영하였습니다. 주변에서 이와 관련한 많은 취재요청이 들어왔지만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한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한사코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기에 그 사람들을 치료하는 한의사들을 그렇게 사랑했고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 후배 한의사들을 바라보았고 6년간 자신을 생각지 않은 끝에 건강마저 잃었지만 한의사들을 향한 마음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우리를 버렸습니다. 두 번의 단식과 6년간의 과로, 스트레스로 나빠진 심장은 더 이상 그 마음을 지탱하기 어려웠습니다. 한의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었던 그를 이제는 우리가 잃었습니다.

그보다 더 훌륭한 한의사는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훌륭한 한의사협회장 역시 언젠가는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의사를 사랑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 사랑하고 더욱 더 행복했어야 할 그의 가족분들께 그를 너무 일찍 빼앗아가버린 것 같아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김지호 전 한의사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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